저만큼의 거리가 만든 판소리의 웃음 세계는 판소리가 어떠한 사유와 감정의 구조 위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글입니다. 이 글은 판소리 서사의 완성과 향유층의 인식이 만들어낸 미학적 거리를 중심으로 판소리의 본질을 되짚었습니다.
판소리의 성립과 이야기 선택의 원리
판소리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로 완결된 시기는 대체로 숙종과 영조 무렵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판소리는 단순한 이야기나 노래가 아니라 음악과 서사가 결합된 종합 예술로 자리 잡았습니다. 판소리의 형성에는 호남 지역 무속 음악과 깊은 관련을 지닌 직업적 노래 집단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판소리가 처음부터 음악과 결합된 형태로 존재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았습니다. 긴 이야기가 음악과 함께 전승되기 위해서는 그에 적합한 조건과 맥락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판소리 이전의 상태는 설화의 영역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춘향전과 같은 장편 서사는 본래 이야기로서 구전되었고 이후 음악적 외피를 입으면서 판소리로 정착했다고 판단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입니다. 무가처럼 오래된 양식이 세속화되는 과정에서 서민들의 삶과 욕망을 담을 수 있는 이야기가 선택되었고 여기에 노래가 결합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선택과 배제가 이루어졌습니다. 판소리로 남지 못한 이야기는 기록조차 남지 않았지만 판소리로 채택된 이야기들은 공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판소리로 선택된 최초의 작품이 춘향전이라는 점은 대체로 이견이 없습니다. 춘향가의 성공은 다른 이야기들의 판소리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심청전 흥부전 토끼전 등으로 이어지는 작품들은 모두 현실의 결핍을 극복하는 서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니라 판소리의 성격과 향유층의 기대에 부합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판소리는 이야기의 선택 단계부터 이미 특정한 세계관과 미학을 내포하고 있었던 예술이었습니다.
꿈꾸는 인물과 향유층의 세계관
판소리의 주인공인 춘향 심청 흥부는 모두 꿈꾸는 존재였습니다. 이들은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결핍과 한계를 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춘향은 신분의 벽을 넘어 양반과 결합했고 심청은 죽음마저 초월하여 황후가 되었으며 흥부는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 부유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서사는 현실의 논리로 보면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판소리의 향유층은 이러한 결말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기생이 양반과 혼인하는 이야기나 맹인의 딸이 황후가 되는 이야기를 허황되다고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판소리 이야기가 기존 질서의 옹호자가 아니라 그 바깥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발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판소리는 기득권층의 논리를 반영하는 예술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의 꿈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세계관 위에 서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민담적 사고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민담의 세계에서는 어린이가 어른을 이기고 약자가 강자를 넘어서도 그것을 비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는 현재는 힘이 없지만 미래를 책임질 존재가 결국 세계의 주체가 된다는 인식을 반영합니다. 판소리 역시 이와 같은 사고 위에서 인물들을 형상화했습니다. 이몽룡은 반드시 어사가 되어 돌아와야 했고 심청은 용왕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 흥부는 제비의 박씨를 통해 부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이야기의 논리가 아니라 향유층의 확신에 의해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판소리 인물들이 난관 앞에서도 대범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확신에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저만큼의 거리에서 비롯된 희극미와 웃음
판소리 예술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희극미의 구현입니다. 이 희극미는 단순한 웃음이나 익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삶을 저만큼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는 거리에서 나왔습니다. 판소리의 이야기는 언제나 비극적인 상황에서 출발했습니다. 가난 신분 차별 장애와 같은 현실의 고통이 서사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이는 판소리를 향유하던 사람들이 실제로 마주하고 있던 삶의 조건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 비극적 현실은 점차 과장되고 고조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향유층은 자신들의 현실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비극을 끝까지 밀어붙인 뒤에야 비로소 그것을 웃음의 대상으로 전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반부에 나타나는 골계적 장면과 해학은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비극이 충분히 인식되었기에 그 덧없음 또한 웃음으로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웃음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인식의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갈등과 긴장에서 벗어나기 위한 놀이적 태도였으며 기존 질서로부터 잠시 이탈하는 해방의 순간이었습니다. 판소리 후반부에 웃음이 집중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구성상의 장치가 아니라 향유층의 정서와 깊이 연결된 미학적 선택이었습니다.
판소리 사설에 나타난 사실성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했습니다. 판소리는 현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습니다. 현실을 객관적 거리에서 유희의 대상으로 전환했을 때 비로소 이야기는 전승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판소리를 근대 소설의 사실주의 잣대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무리가 있습니다. 판소리는 민담적 사고 위에서 현실을 비틀고 웃음으로 승화시킨 예술이었습니다. 저만큼의 거리를 확보했기에 판소리는 비극을 웃음으로 바꾸는 힘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